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리 제국 (문단 편집) == 경제 == ||[[파일:ancientafricangold.jpg|height=300]]||[[파일:mansamunsa-parade2.jpg|height=300]]|| ||말리 제국의 보편적인 통화였던 금가루||황금으로 치장한 만사 무사의 행렬|| [[만사 무사]]의 전설적인 일화들을 보면 알겠지만 '''말리 제국은 엄청나게 부유한 국가였다.''' 주로 아랍권, 지중해권을 상대로 한 교역을 통해서 특산품인 황금을 수출하고 막대한 양의 물화들을 들여왔고, 덕분에 말리 제국은 상대적으로 척박한 아프리카 일대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저 먼 나라들에서 나는 향료나 몰약, 비단 등 수많은 사치품들을 향유할 수 있었다. 특히 만사 무사 시절 교역, 문화의 중심지인 [[팀북투]]가 말리 제국의 손에 들어오면서 말리 제국의 경제는 그야말로 수직상승했다. 팀북투를 거쳐가는 수많은 교역로들을 한 손에 움켜쥔 말리 제국은 이 과정에서 상당한 고세율의 교역세와 통행세를 걷었고, 제국의 국고는 날로 풍족해졌다. 물론 이도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개 그랬듯이 말리 제국 역시 내분과 외세 침략으로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쇠퇴했고 이로 인해 교역로들을 빼앗기자 예전만큼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없게 되었다. 말리 제국은 국경지대에 총 3개의 핵심적인 대규모 황금 광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말리 제국의 세수는 거의 대부분 이 광산들에서 나왔기에 역대 황제들은 다른 건 몰라도 이 황금 광산에만큼은 엄청나게 신경을 쏟으며 관리했다. 황제들은 이 곳에 거대한 요새와 초소들을 설치하고 국경 검문소로 활용하였으며, 이 곳에서 파낸 황금 1 [[온스]]마다 철저하게 세금을 매겼다. 또한 국경 검문소라는 용도 답게 이 곳을 통과하는 [[소금]], [[구리]] 등 다양한 물품들에도 통행세를 매기면서 밀수를 최소한으로 차단하고자 했다. 14세기 초 말리 제국은 '''전세계 황금의 절반을 생산했다.''' 워낙 말리 제국이 보유하고 있던 금 매장량이 압도적이었던 탓에 현대 [[기니]]에 있던 말리 제국 시절 광산들 중 하나는 그렇게 파냈음에도 불구하고 12세기까지 여전히 금을 생산했다고 한다. [[금괴]]는 모두 황제들의 소유였고 금괴나 금덩어리로 거래하는 것은 철저히 불법이었다. 시민들이 파낸 황금으로 만든 주괴와 금괴들은 모두 일단 황실 보물고로 보내어 저장했고, 제국 관리들은 황실 보물고에 있는 금괴들을 쪼개 금가루로 만든 다음 이를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때문에 시민들은 어떻게 보면 금덩어리에 해당하는 [[금화]]를 쓸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으며 모두 금가루를 이용해서 상행위를 했다. 금을 보편적인 통화로 활용한다는 것은 보통의 국가들이었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워낙 말리 제국에 말그래도 금이 넘쳐났기에 이게 가능한 것이었다. 보통 금가루의 단위는 '미스칼'이라고 해서 약 4.5g 정도였으며 외국에서는 같은 양의 [[디나르]]와도 교환했다. 금 외의 광물들도 인기가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구리]]였는데, 보통 타케다 광산에서 채굴했으며 60개의 구리 주괴를 금 100디나르 정도와 교환했다. 금 외에도 [[소금]]도 꽤나 중요한 화폐 단위였다. 해안가를 제외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내륙 지대에서 소금은 [[암염]] 광산이나 극소수의 염호를 제외하면 함부로 찾아볼 수 없는 굉장히 중요한 물품이었다. 가끔씩은 심지어 황금보다도 더한 가치를 가지기도 했을 정도. 보통 아프리카 내륙 남부 지방에서는 금보다도 더 높게 쳐줬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워낙 소금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북부 지방에서는 아랍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생산한 소금이 가끔씩 카라반 등을 통해서 유통되었기에 남부만큼 소금 부족에 시달리지는 않아 소금이 남부에서만큼의 가치를 가지지는 않았다. 말리 제국에는 소금 광산도 있었다. [[이븐 바투타]]는 당시 소금광산들 중 하나였던 타크하자 광산에 대한 기록을 남긴 적도 있는데, 그 광산에는 소금과 돌 빼고는 아무 것도 없어 너무 황량했다고 적었다. 이 광산에서는 오히려 소금이 너무 흔해서 인부들이 사는 집조차도 소금으로 지었고, 땅의 염도가 너무 높아 건강에도 좋지 않고 식물도 자라지 못하니 광산 인부들을 제외하면 그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